동해신묘의 정체성과 복원에 대한 학술대회

1. 각종 기록을 통해 본 동해신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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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75회 작성일 2023-03-07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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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 지역에 설치된 국가 차원의 제장은 신라에서 동해와 북해에 제사지낸 제장울 경상 도와 삼척 비례산에 설치하였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양양에 東海神祠를 설치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두만강 하구에도 제장을 설치하였다. 이와 같은 제장들은 각 시기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이에 한반도 전체를 관장하는 국가로 발전한 고려시대 이후에 동해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된 신앙 처소를 동해를 대표하는 진정한 중심 제장으로 볼 수 있다. 이에 고려시 대에 양양에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東海神祠가 지닌 위상과 의미는 매우 크다고 볼수 있다.

고려사를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 각종 지리지 등에 소개된 東海神祠[東海神廟] 관련 기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표] 각종 기록에 소개된 東海神祠[東海神廟] 관련 기록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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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정리한 표를 통해 東海神祠[東海神廟]를 언급한 최초 기록은 고려사 임을 알 수있다. 당시 제당 명칭은 東海神祠였고, 현재 양양인 익령현에 설치하였다고 소개되어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 여지도서, 양양지역 읍지인 현산지 등 각종 지리지, 각종 문집 등에 東海神祠[東海神 廟] 관련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이들 자료를 통해 양양부 동쪽에 설치한 東海神祠[東海神廟]는 정전(正殿) 6칸, 신문(神門) 3칸, 전사청(奠祀廳) 2칸, 동서재(東西齋) 각 2칸, 백천문(百川門) 1칸으로 건립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와 함께 매년 초에 별제(別祭)와 2월[仲春]․8월[仲秋]에 상제(常祭)를 지냈는데, 이때 올린 향(香)과 축(祝)을 중앙 정부에서 내려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제사 주관을 양양부사가 관장하였음 또한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東海神祠[東海神廟]에서 국가 차원의 제사와 함께 민간에서도 개인적으로 그 주변에 와서 바다에서의 안녕과 풍어 등을 기원하는 신앙 행위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정조대에 중수하는 등 국가 제장으로서의 격을 갖춘 형태로 유지되었던 東海神祠[東海神 廟]는 고종대에 동해를 관장하는 제장을 양양에 설치한다는 기록을 통해 조선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잘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 통감부 훈령으로 1908년 12월 26일 양양 군수 최종낙(崔鍾洛)이 동해신묘를 훼철(毁撤)하였기에 국가 제장으로서의 동해신묘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1993년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정전 1동이 건립되었으며 정전의 북·서쪽에두 토막이 났던 동해신묘중수기사비(東海神廟重修記事碑)를 복원(復元)하여 세워 놓았다.

2000년에 동해신묘지(東海神廟址)와 남공철의 중수비를 강원도 지방기념물 제73호로 지정하 였기에 양양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제당 명칭을 ‘東海神廟 31) ’라 부르며, 건물 정면에는 ‘東海廟’라 쓴 현판을 걸었다. 그런데, 위의 표를 보면 제당의 명칭을 東海神祠, 東海神廟, 東海神祠堂, 東海廟, 東海 神檀 등 다양하게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각각의 명칭에 따라 東海神廟가 지닌 의미가 부분적으로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으나, 큰 틀에서 동해신을 모신 제의 공간이라는 의미에는 차이가 없다. 다만 제의 공간이 지닌 형태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인식 차이로 인해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운 것으로 보인다.

 

동해신묘에 관한 여러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허균의 글에 전하는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력 갑신년 7월 양양부 동산리에 사는 어부 지익복이 배를 타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중바람이 그 배를 몰고 가는데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이렇게 일주야를 달려 동쪽으로 한 섬에 닿았는데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인도하여 왕궁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왕궁에 나아가니 궁 뜰에는 창을 든 병사의 경계가 매우 삼엄하였다. 왕이라는 자가 보라색 옷을 입고 궁전에 앉아서 말하기를 내가 강릉에서 제사를 받아먹은 지 수천년이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강릉부 사람에게 쫓기어 이곳으로 옮겨와 보니 좋은 곳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상제께 호소한 끝에 이제 비로소 허락을 받았으니 너의 힘을 빌려 관원에게 뜻을 전하고 옛 땅 내 집에 돌아가고자 하니 너는 목민관에게 말하라. 그렇지 않으면 군사를 몰아치게 할 것이니 백성 들이 나의 해를 입게 될 것이다 하고는 바람을 몰아 돌려보내 주었는데 하루가 못 되어 동해로 돌아왔다. 어부는 매우 이상하게 여겼으나 감히 관가에 나아가 스스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향임(鄕任) 이석림에게 말하여 관아에 보고하게 하였다.

 

이 설화 외에도 동해신묘에서 관우를 제향하였다는 설화도 양양군에서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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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위 표에서 소개한 문헌은 필자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각종 지리지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서 정리하였다. 이와 함께 각종 문집 등에 소개된 기록은 아래 글을 참고하였다.

이규대, 「양양 동해신묘의 자료 및 연구성과의 검토」, 『양양 동해신묘』, 강릉대 박물관, 1999.

양언석, 「동해신사(東海神祠) 고찰 –명칭을 중심으로-」, 『아시아강원민속학 』제33집, 2020.

31) 東海神祠, 東海神廟, 東海神祠堂, 東海廟, 東海神檀 등 다양하게 불리우는 제당 명칭을 필자가 이 글에서 東海神廟라한 것은 현재 공식적으로 부르는 명칭이 東海神廟이기에 이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