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4호

Ⅰ. 머리말

페이지 정보

조회 377회 작성일 2023-02-06 18:30

본문

양양은 선사문화(先史文化)가 살아 숨 쉬는 보고(寶庫)로 신석기 최고(BC 6000)의 역사를 간직한 고장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시대의 설악(雪嶽)은 양양의 진산(鎭山)으로 소사(小祀)의 예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지리적 특성은 동쪽으로는 동해에 연접하고 서쪽으로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이 가로놓여 영로(嶺路) 또한 동서로 넘나드는 중요한 길목이라 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양양도호부(襄陽都護府) 편에“요해(要害)는 본부(府) 서쪽으로부터 인제 경계 소동라령로 가는데 36리, (要害, 自本府西去麟蹄境所等 羅領三十六里)”라 했고, 선조 29년(1596) 2월에 오색령에 대해“비 변사가 적병이 영동으로 침입하면 이 영을 넘을 것이니 방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국방 체제상 요충지였음을 알수 있다.

조선 성종 21년(1490) 안인포(安仁浦)의 만호영(萬戶營)이 양양의 대포영(大浦營)으로 옮겨온 것은 안인포가 돌로 막혀 있어 배의입출이 쉽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 라 했다. 그러나 안인포가 옮겨 오기 이전부터 양양 남대천 하구에는 이미 산성포(山城浦)가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은 세종 4년(1422)에 변처후(邊處厚)가 양양에 군수로 있을 때 …경내(境內)의 산성포 만호(山城浦萬戶) 이양수(李養脩)에게 소금을 청하여 면화(緜花)와 닥나무[楮]를 바꾸었습니다. 2) 라는 대목에서 양양 경내에서는 처음으로 산성포(山城浦)란 포구 명칭이 등장한다.

강릉대학교 박물관 조사팀이 밝힌 양양군의 관방유적(關防遺蹟) 중 낙산사의 오봉산성(五峯山城)은 포곡형(包谷形)의 성곽(城廓) 3) 으로, 일명 낙산산성(洛山山城)이라고도 하는데, 채집기와 등으로 유추할 때 고려 시 대 이후에 축조되어 왜구의 침입 등에 대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양양 남대천 하구로부터 반경(半徑) 2km 내의 성곽으로는 양양읍 조산리 성안마을 대포영성(大浦營城)과 낙산사 오봉산성(五峯山城)뿐이다. 그렇다면 산성포(山城浦)의 명칭은 낙산사 오봉산성(五峯山城)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남대천 하구 인근의 산성으로는 낙산산성이 유일하였기 때문이다.

『세조실록』에 자주 거명되는 양양포(襄陽浦)와 강릉의 연곡포(連谷浦)는 유사점이 있다. 파도가 치면 모래가 하구에 쌓여 물길의 변동이 발생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고 본다. 당시의 지도를 확보할 수 없어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1918년도에 발행한 1/50,000 지도에 표기된 강릉의 연곡천 하구와 양양 남대천 하구의 모습을 비교해 보았다.〈그림 2, 3〉

조선 중기와 일제강점기와의 시차(時差)는 상당히 있다. 그러나 매년 되풀이되는 강수량의 증·감에 따른 물길의 유동은 피할 수 없다고 본다.

최근에 조선시대 양양지역의 대포수군 만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속초문화원의 역사, 문화 부문에서 산성포(山城浦)는 속초포(束草浦)의 이명(異名) 4) 일 확률이 높다는 주장이 나왔다.

세조 8년(1462) 병조에서 山城萬戶·連谷萬戶를 없애고 울진·삼척에 만호를 두게 하였다. 5년 후인 세조 13년(1467)에 일찍이 革罷한 連谷浦·襄陽浦 두포의 船軍과 강(江)의 선척(船隻)을 다시 설치하고 만호가 수어토록 했다. 5)

그로부터 1년 후인 세조 14년(1468)에 일찍이 혁파한 연곡·양양포 두 포의 선척과 수부를 안인포에 이속하고 만호를 차견하여 방어토록 했다. 6) 란 기사가 왕조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양양 경내에서 일찍이 혁파한 포(浦)를 산성포(山城浦)라 하였는데 산성포란 명칭이 속초포의 이명이라는 전거(典據)는 그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시 국가에서 명칭에 대한 구체적 설명도 없이 일찍이 혁파한 양양포(襄陽浦)의 선군(船軍)과 강(江)의 선척(船隻)을 다시 설치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 산성포는 호수가 아닌 강(江)의 포구라는 것과 산성포가 별도로 존재하였던 포가 아니라 명칭만 달리하였을 뿐 곧 양양포의 이칭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부연 하면 양양군의 수계는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남대천, 물치천, 쌍천과 만월지맥에서 발원하는 동명천, 상운천, 광정천, 해송천, 화상천 모두 8개소의 물이 동해로 흐르는데 선척(船隻)이 가능한 하천은 양양 남대천 하구가 유일하다.

조선 성종 21년(1490)에 안인포에서 옮겨와 양양남대천 하구를 중심으로 대포영성(大浦營城)과 대포(大浦)로 지정할 때 입지 조건이 충분히 갖췄기 때문에 선정되었다고 보며, 지금은 하구 주변의 개발로 과거의자취를 찾을 수 없다. 양양문화원 발행『鄕土誌』에는 대포(大浦)를 일명 황포(黃浦)라 하였으며, 양양면 조산리 전방 남대천 하류구(下流口)에 있다고 했다.

본고에서는 조선 성종 때에 강릉 안인포에서 양양으로 이전된 대포(大浦)보다 앞서 이미 개설한 포구가 존재하였다는 사실과 포구의 명칭의 변천 과정은 최초 산성포(山城浦) → 양양포(襄陽浦) → 대포(大浦)순으로 개칭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고문헌을 통해 살펴보고, 지난 2011년 3월 이 지역의 전주이씨 완풍대군(完豊大君)의 후손들이 선묘를 천장(遷葬)하는 과정에서 발굴된 약 500여 년간 감춰졌던 양양 출신 대포 수군만호(大浦水軍萬戶) 이봉(李芃)의 묘지석(墓地石)의 위상을 재조명(再照明)하여 향토문화 발전에 기여토록 함이다.

 

 

08_1.jpg

 

<그림 1> 세종실록 권15 기사 내용 원문

 

 

 

09_3.jpg

 

<그림 2> 1918년 조선총독부발행 (1/50,000) 양양 남대천 하구 모습

 

 


09_4.jpg

 

<그림 3> 1918년 조선총독부 발행 (1/50,000) 강릉 연곡천 하구 모습

 

-----------------------------

1)『 新增東國輿地勝覽』江原道 襄陽都護府 關防. 「大浦營 在府東十二里 成宗二十一年 自江陵安仁浦移泊于此 水軍萬戶一人 正德庚辰築石城 周一千四百六十九尺 高十二尺」

2) 世宗實錄 卷15 世宗 4年(1422年) 1月 25日 記事 3) 지현병·전유길『 , 襄陽郡의 關防遺蹟』『 . 襄陽郡의 歷史와 文化遺蹟』江陵大 博物館. 1994.

4) 2011年 江原道 鄕土論文發表大會 (세종·세조실록상의 속초포(束草浦)와 산성포(山城浦)의 위치 비정 연구)

5) 세조실록 43권, 세조 13년 8월 24일(丁巳) 7번째 기사 6) 세조실록 46권, 세조 14년 6월 4일 임진 3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