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4호

Ⅳ. 수군만호 이봉(李芃)의 墓地石 出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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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67회 작성일 2023-02-06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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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군만호 李芃


2011년 강원도 양양에 사는 전주이씨 완남군파(完男君派)의 납골묘 조성 과정에서 조선조 중종 때 대포만호(大浦萬戶)를 지낸 이봉(李芃)의 묘지석이 출토된다. 문중의 기록에 의하면 이봉(李芃)은 강원도 양양출신(襄陽出身)인데 그의 조부 진릉군[晋陵君/司憲府:執義]이 계유정란(端宗癸酉靖亂)으로 삼척(三陟)에 유배(流配)되었다가 4년이 지난 1456년 봄에 풀려나 양양으로 이전하여 터를 잡는다. 간성군수 겸 강릉진병마동첨절제사(杆城郡守兼江陵鎭兵馬同僉節制使)를 지낸 그의 부친 교리공(校理公)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대포만호(大浦萬戶) 이봉은 그의 둘째 아들이다.

묘지석에 의하면 이봉은 21세인 1507년 충무위 무관 벼슬길에 나가고, 1526년 내금위로 전보되었다가 3년 만인 1529년에 공을 인정받아 43세에 서반 정3품 당하관인 어모장군 신분으로 대포만호에 임명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 성종(成宗) 21년(1490년)에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안인포(安仁浦)에 있던수군기지(水軍基地)가 양양도호부(襄陽都護府) 대포로 옮겨오고 중종(中宗) 15년(1520년)에 둘레 1,469척, 높이 12척의 석성(石城)을 쌓았다고 하니 그는 군항(軍港)으로서 대포영의 모습이 어느 정도 갖춰진 후에 근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묘지석에는 그가 퇴직하여 강촌에서 쉬면서 고향 선비 선배들과 지내다가 1552년 2월 1일 자택에서 66세를 일기로 병사하여 동년 4월 9일 양양부 북리 위산촌(지금의 양양읍 기정리)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풍습이나 환경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살던 집과 묘소가 멀지 않았을 것이고 그의 근무처와 거처(사저이든 관저이든)가 근거리에 있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유추를 감안하거나 청구도에 표기된 대포의 위치를 볼 때 대포영은 현재의 기정리와 인접하고 하구가 잘 발달된 조산리 인근에 위치하였다는 설명이 설득력이 있다.




2. 교리공(校理公) 문중의 방조산소(傍祖山所) 관리


교리공(校理公)은 아드님 두 분을 두었는데 제1남은 성균진사(成均進士) 휘 옹(蓊)으로 후손들이 왕성하게 번성하여 숭조돈종의 씨족문화를 계승하고 있으나, 제2남인 대포만호(大浦萬戶) 휘(諱) 봉(芃)은 삼대(三代) 밖에 잇지 못하고 절손되었으니 500여 년이 훨씬 지난 이 날까지 교리공(校理公) 제1남의 후예(後裔: 이하교리공파라 칭함)들이 방조의 묘소관리와 봉제사(奉祭祀)하여 왔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는 시대사조(時代思潮)에 의해 숭고한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 고유 전통문화는 날로 퇴폐화(頹廢化)의 늪으로 몰락하고 있으며 장묘문화(葬墓文化)는 시대에 따라 편리하게 변질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변 일부에서는 방조산소(傍祖山所)를 봉제사하는 교리공파 문중에 대하여 힐난(詰難)하는 퇴폐풍조가 안개같이 일어나는 현실을 극복하고자 부득이 문중 결의를 거쳐 한곳에 납골묘(納骨墓)를 조성하고 영원히 봉제사하고자 2011년 3월 21일 양양군 손양면 학포리 산10번지 선영하(先塋下) 건좌손향원(乾坐巽向原)에 조부모(祖父母) 다섯 부부의 유해를 봉안하게 되었으며, 이곳 납골묘에 모신 방조(傍祖)는 다음과 같다.



어모장군행대포만호휘봉 (禦侮將軍行大浦萬戶諱芃) 

배숙부인강릉박씨 (配淑夫人江陵朴氏) 

통훈대부행내수사별좌사헌부감찰휘공추 (通訓大夫行內需司別座司憲府監察諱公樞) 

배숙인안성이씨 (配淑人安城李氏) 

통덕랑행순릉참봉휘공권 (通德郞行順陵參奉諱公權) 

배공인정선전씨 (配恭人旌善全氏) 

내금위장휘공로 (內禁衛將諱公櫓) 

배정부인강릉김씨 (配貞夫人江陵金氏) 

계공랑행군자감직장휘경림 (啓功郞行軍資監直長諱景霖) 

배안인강릉박씨 (配安人江陵朴氏)




3. 傍祖墓所 啓墓에 대한 有感


우리 사회에서는 조상의 묘소를 천장(遷葬)하는 사례를 많이 본다. 계묘(啓墓)하는 과정은 통속화된 사례 편람에 의한 개장 절차에 따랐다. 지난 2011년 3월 21일 일찍부터 부슬부슬 차가운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포클레인을 앞세우고 교리공파문중 회장 정하(正河), 총무 주성(柱誠)외 종원 5명[주희(柱禧)·복수(福洙)·주일(柱一)·주천(柱千)·종우(鍾㝢)] 이 대포만호 이봉(李芃)의 개산부터 착수했다.

먼저 대포만호(大浦萬戶) 이봉(李芃)의 신상(身上)을 살펴보면 품계는 정3품이며, 어모장군(禦侮將軍)이다. 조선 성종(成宗) 21년(1490년)에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안인포(安仁浦)에 있던 수군기지(水軍基地)가 양양도호부(襄陽都護府) 대포[大浦: 지금의 양양읍 조산리 성안말] 로 옮겨왔다.

당시에는 대포영(大浦營)의 남쪽 일대가 포구로써 군항(軍港)이었다. 조선 중종(中宗) 15년(1520년)에 축성(築城)한 석성(石城)의 규모는 둘레1,469척, 높이12척의 수군기지(水軍基地)였으며, 대포영(大浦營)의 수군만호(水軍萬戶)는 오늘날의 동해안방어(東海岸防禦) 해군기지의 사령관 지위(地位)였다.

계묘(啓墓) 과정을 보면 포클레인 날이 회곽(灰槨)을 열지도 못하고 깨뜨리지도 못하여 오랜 시간 실랑이끝에 회곽 뚜껑을 깨뜨렸다. 문화재 관리기관의 협조하에 개장했어야 하는 것을 문중의 주도로 개산한 것이 문제였다.

당시의 상황은 옻칠을 한 관(棺)과 곽(槨)이 2중으로 되어 있고, 시신을 감장한 수의는 비단으로 여겨지는데 그 두께가 무려 10㎝ 정도였다. 전부 훼손되고 유품도 파손되어 수습이 불가능한 상태였으며 다만 관모에 달렸던 구슬 백 여 개는 수습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육안으로 보아 3㎝ 정도의 두께에 30㎝ 정도의 정방형 현무암으로 추정되는 묘지석(墓地石) 한 장만은 온전하게 수습하여 판독하였다. 다른 4기의 묘소 개장도 유골만은 제대로 온전하게 수습하여 화장을 마쳤으나 유물은 수습하지 못하고 옹기로 구운 깨진 지석은 수습하였으며 개장 작업과정에서 몇 자는 훼손되어 읽을 수는 없었으나 판독은 가능했다.

안타까운 것은 500여 년의 장구한 세월이 지난 이봉(李芃)의 산소 납골묘 설치는 완료하였으나, 개 장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서투른 일 처리로 귀중한 소장품들이 일시에 훼손(毁損) 되었다는데 대하여 심각한 우려와 개탄(慨嘆)을 금치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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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3> 이봉 대포만호 봉분 출토유물




4. 出土한 地石과 族譜上의 墓地 記錄


1) 大浦萬戶 諱 芃 地石 收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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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석 원문>


禦侮將軍行大浦萬戶李公之墓

皇明嘉靖三十一年四月日誌

禦侮將軍大浦萬戶李公諱 &#33411;字而栗其先完山人考諱

承福奉列大夫宰于杆城母延日鄭氏封今人三峯先生

道傳之後錘之女成化丙午六月念有一日生于襄陽正

德二年始仕于忠武衛嘉靖丙戌遷仕于內禁衛第三年

六月以建功諷大浦萬戶取後不仕退休江村天稟謹厚

接人以慣一鄕士林咸以長者享之歲在壬子二月初一

日病終于家越四月初九日葬于襄陽府北里位山村兌

來乾坐巽向之山娶薺浦僉使朴公成轍之女生子三生

女一長子公權學術該博次子公櫓武材超越又其次公

楗早年寒疾夭焉女適陽村先生之裔進士權堰長男任



<묘지석 원문 번역>


어모장군 행 대포만호 이공 지묘

서기 1552년 4월 일 기록

어모장군 대포만호 이공의 휘는 봉, 자는 이율이며. 선친은 봉열대부(종4품)로서 간성군수를 지냈고, 어머니는 연일 정씨 삼봉 정도전의 아들 추의 딸이다.

서기 1486년 6월 21일 양양에서 출생하여, 1507년 2월 비로소 충무위 무관 벼슬길에 나갔고, 1526년 내금위로 전보되었다가, 3년만인 1529년 6월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우고자 대포영(당시 강원도 양양도호부의 남대천 하구 북단에 위치한 군항)의 만호로 부임하였다.

그 후 벼슬길을 마치고 강촌에서 타고난 기품이 신중하고 중후하신 성품으로 고을의 선비들과 함께 한결같이 유유자적하다가 1552년 2월 1일(향년 66세)에 병으로 자택에서 별세하여 동년 4월 9일 양양부 북리 위산촌(지금의 양양읍 기정리 진동) 동쪽 산에 건좌손향(乾坐巽向)으로 장사를 지냈다.

부인은 제포첨사 박성철의 딸이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맏이 공권은 학문과 예술이 해박하고, 둘째 공로는 무예가 뛰어나고, 셋째 공건은 어려서 한질로 요절했으며, 딸은 양촌선생(권근)의 후예인 진사 권언의 장남과 혼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