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4호

Ⅴ. 맺음말

페이지 정보

조회 398회 작성일 2023-02-06 15:13

본문

우리나라는 바다와 연결되는 하천이 많아 일찍부터 물자와 사람을 운송하는데 선박을 이용하였으며, 자연히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활용하게 되었다. 기록을 통해 볼 때 이미 삼국시대부터 수군을 전투에 활용하고 있 으며,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이는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군사체제에 수군이 완전히 정규 군으로 편제되어 수군 병종을 따로 설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도별로 수군절도사를 두고 예하 부대를 배치하여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조선 초기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는 6개 수군만호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포는 세종4년(1422) 산성포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여 세조 8년(1462) 포구에 모래가 메워져서 배가 정박하기 어려우므로 연곡만호와 함께 혁파되어 울진, 삼척으로 옮겨갔다.

그후 세조 13년(1467) 다시 양양과 연곡의 두포를 개선하여 선군과 강의 선소를 다시 설치하고 만호를 두었으나 세조 14년(1468) 안인포로 이송하고 만호를 차견하였다.

여기에서 세조 8년의 산성포는 세조 13년의 양양포와 동일한 곳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대포항은 양양동쪽 12리에 위치하며, 강릉 인인포에서 조선 성종21년(1490) 에 양양으로 옮겨왔고 중종 15년에 성을 쌓았다고 했다.

성종 때 안인포에서 대포로 만호영을 옮겨 온 것도 안인포가 돌로 막혀 있어 배의 출입이 용이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대포영이 폐지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선조실록에 의하면 1605년에 을사포락이 있었고 양양 동명 서원기에 의하면 1628년 조위한 부사가 취임하여 폐사된 대포 만호영 관사를 동명 서원으로 임시 활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즈음 폐지된 것으로 본다.

 

수군만호 이봉은 양양출신으로 1529년 43세에 대포만호에 임명된다.

발굴된 묘지석에는 그가 퇴직하여 고향에서 지내다가 1552년 66세 일기로 병사하여 양양부 북리 위산촌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은 그의 근무처와 거처의 근거리임을 알 수 있다.

문중에서 2011년 납골묘를 조성하고자 묘소를 개장하는 과정에서 소장품의 일부와 묘지석을 수습하였는데 원문에서 대포영 만호를 부임했음을 확인하였다.이것으로 대포만호영 이전에 관한 내용을 고찰하고 확인하였으나 영의 폐지와 관련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고증적인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고 본다.

 

 

【참고문헌】

『新增東國輿地勝覽』 

『增補文獻備考』

『世宗實錄』

『世祖實錄』 

『成宗實錄』 

『與地圖書』 

『大東地志』 

『東國與地志』 

『鄕土誌』 1976年. 襄陽文化院 

『朝鮮寶物古跡調査資料』 1942. 朝鮮總督府 

『襄陽郡의 關防遺跡』江陵大學校博物館 

『襄陽郡의 歷史와 文化遺蹟』 1994. 지현병, 전유길 

『世宗ㆍ世祖實錄상의 束草浦와 山城浦의 위치 비정연구』2001년 강원도향토논문발표대회 

『峴山三十詠』第29詠 納灝堂望海. 李海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