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3호

2. 동해북부선 철도의 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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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814회 작성일 2022-02-1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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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일본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많은 양의 철과 목재를 필요로 했었고, 양양은 설악산에서 오대산에 이르는 조선시대 황장목의 보고였으며, 양양철광산은 남한 철 생산량의 95%를 점했을 만큼 생산량이 많았으므로 전쟁 중이었던 일본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에 일본은 양질의 목재와 철광석을 수탈해 실어 나르기 위해서는 철도가 필요했었다.

조선총독부의‘조선철도 12년 계획’에 의하면 본래 이 동해북부선은 경원선(京元線)의 안변에서 동해안을 따라 강릉, 삼척, 울진, 포항까지 연장하여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을 통하여 부산까지 연결시킬 계획으로 착수된 철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

그러나 1928년 2월 2일 안변에서 흡곡 구간 착공을 시작으로 8개 구간으로 나누어 단계적으로 1937년 12월 1일 양양역까지 개통함으로서 192.6km 구간을 건설하는데 1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표 1> 동해북부선 영업 개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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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양양역까지 개통한 후 8·15해방까지 8년이라는 기간이 있었음에도 양양역에서 강릉까지 40여km의 노반공사조차도 마무리 못한 점과 양양역에는 다른 역에서는 볼 수 없는 전차대[轉車臺:기관차 방향을 돌리는 회전식 설비]과 증기기관에 물을 공급하는 물탱크, 물을 끓이는 온수시설, 석탄야적장, 석탄재 야적장 등을 시설하였던 점에 비추어 볼 때 내적으로는 양양역을 종착역으로 한 철도였음을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림 1> 관보 및 안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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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고시 제808호 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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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변 역 사>




1) 동해북부선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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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변·양양간의 철도개통


1917년부터 국유철도의 경영을 남만주철도에 위탁했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1925년 4월 1일 다시 직영으로 환원하고 철도망 확충을 위해『조선철도 12년 계획』을 세웠다. 1927년부터 시작하여 1938년에 끝난 이 사업으로 5대 간선철도에서 요충지로 다시 갈라져 나오는 주요 철도가 건설되었다.

이 사업으로 건설된 노선은 도문선(회령 도문), 해산선(길주 해산), 만포선(순천 만포진), 경전선(진주 전주 원촌, 담양), 동해선(원산 포항 울산, 부산) 등이다.

동해선은 이 계획으로 신설되는 5개의 간선철도 중 하나로 동해안 일대의 어항과 강원도 일대의 광산을 개발하여 석탄, 목재, 광물, 해산물을 수송하고 부산과 원산(경원선)을 연결하는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동해선 건설은 원산 부근의 경원선 갈마역에서 안변군, 통천군, 고성군, 양양군, 강릉군, 삼

척군, 울진군, 영덕군을 거쳐 영일군의 경동선 포항역에 이르는 구간을 신설하는 북부선, 경부본선 부산진역에서 동래군을 거쳐 울산군의 경동선 울산역에 이르는 구간을 신설하는 남부선, 조선철도 경동선을 국유화하여 표준궤로 개량하는 중부선으로 나누어 부산진역~갈마역간 본선과 경주역~대구역간 지선을 완성하는 사업으로 진행되었다.

1927년에 일본 제국의회의 승인을 받아 공사에 착수하였다. 동해북부선은 안변역 분기안이 제기되어 당초 계획이었던 갈마역 분기안과 비교한 결과 1927년 5월 안변역 분기로 결정, 1928년 2월 착공하여 1929년에 안변역~흡곡역간, 1931년에 흡곡역~통천역간, 1932년에 통천역~고성역간, 1935년에 고성역~간성역간, 1937년 12월 1일 간성역에서 부터 양양역간의 철도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로서 약 551km의 조선철도 12년 계획은 경전선과 동해선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완성되었다.2)

동해선은 세 노선으로 북부선(안변~포항)과 중부선(포항~경주), 그리고 남부선(울산~부산)으로 구성된다. 남부선은 완공되어 기존의 경동선과 연결되어 부산, 포항 구간이 완전하게 개통되었다. 하지만 동해북부선은 1929년 9월 11일 안변~흡곡 사이가 개통된 후 8개 구간으로 나누어 연차적으로 착공하여 1937년 12월 1일 강원도 양양(192.6km)까지만 연결하였고 그 후 8·15해방까지 8년의 기간이 있었음에도 양양에서 강릉 구간은 노반공사도 마치지 못하고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동해북부선의 경원선 안변 분기점에서 시작하여 양양까지의 총 노선 192.6km의 역구간 거리와 누적 거리를 세부적으로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표 2> 동해북부선(안변~양양)역간거리 및 누적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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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해북부선 기차 소요시간과 승차요금


(1) 소요시간


양양에서 원산으로 하루에 4회 운행되었으며, 1940년 4월 1일에 개정된 양양에서 원산까지의 상행선(上行線) 열차운행 시간은 출발 시각과 기관차 종류마다 차이가 있었다.

양양에서 새벽 05시 35분에 원산으로 출발한 제1342호 기차는 8시간 50분, 아침 09시 30분에 출발한 제362호 기차는 약 7시간, 낮 12시에 출발한 제1344호 기차는 9시간이 소요되었으며, 저녁 6시 15분에 출발한 제364호 기차는 6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표 3> 양양·원산행 상행선 승차 요금 및 기차시간표 (1940.4.1.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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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4> 원산·양양간 하행선 승차 임금 및 기차시간표 (1944.10.1.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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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승차요금


기차 승차 요금은 1940년 4월 1일에 개정된 표에 의하면 양양에서 원산까지 당시 화폐기준으로 2등석이 5원 85전, 3등석 요금은 3원 25전으로 양양에서 원산까지의 상행선 기차 시간과 기차요금은 <표 3>과 같으며, 1944년 10월 1일에 개정된 원산에서 양양까지의 하행선 기차요금은 2등석이 14원50전 3등석이 6원 50전으로 <표 4>와 같다.



(3) 구간 역


동해북부선 안변에서 양양까지 거리는 192.6km이며 안변역과 양양역까지 사이의 구간 역은 안변군 오계, 상음, 자동, 흡곡, 패천, 통천군 송전, 고저, 통천, 벽양, 염성, 두백, 남애, 장전, 외금강, 삼일포, 고성군 고성, 초구, 제진, 현내, 거진, 간성, 양양군 공현진, 문암, 천진, 속초, 대포, 낙산사역까지 27개역이 있었다. 당시 공현진, 문암, 천진, 속초, 대포역은 양양군 관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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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원산 역사 모습



4) 철도부설로 인한 사회·경제적 변화


철도 부설은 철도 연선의 사회·경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철도의 개통과 더불어 전선 각역에서 소운송업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도 그러한 현상의 하나였다. 소운송업은 철도와 함께 출연하여 철도를 매개로 활동하였던 새로운 교통운수업이었다. 그리고 소자본으로도 비교적 자유롭게 경영할 수 있는 업종이었기 때문에 철도를 따라 침투해 왔던 일본인 자본과 객주. 여객 등으로부터 전환한 한국인 자본이 대거 진출하였다. 1926년 무렵 전선 각역에는 1,566점의 소 운송업자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한국인 업자는 1,080점(69%)이나 되었다.3)



자본 위주의 통합정책은 한국인 업자의 호구지책을 박탈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한국인 업자와 하주들은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일부 일본인 업자와 연합하여 조선총독부의 통합정책에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기차가 개통되기 전에는 동해안의 소금이나 소금에 절인 생선을 지고 영을 넘어 영서지방에 가서 곡식을 바꾸어오던 보부상이 성행하였으나 열차가 개통되면서 사람들은 소자본으로 기차를 이용하여 동해안의 생선을 싣고 중국 만주까지 가서 팔고 돌아 올 때는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과일이나 농산물을 싣고 와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새로운 부자가 생겨나고 상업이 활발해졌다. 또한 양양의 철광석과 목재를 운반하기 위한 열차 운행이 큰 역할을 하였다. 역 주변에는 여관이나 상점이 생겨나서 역 주변에는 새로운 거리가 생겨났다.

해안지방으로 인구도 적고 산업이나 군사적인 면에서도 중요성이 낮았지만 금강산을 비롯한 몇 개의 관광지가 있었기 때문에 일요일이나 공휴일의 전날에 경성역(서울)에서 야간열차가 운행되기도 하였고, 강릉 삼척 울진지방에서 경성으로 가기 위하여 양양역에 많은 사람이 북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