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3호

4. 동해북부선의 최종 목적지 양양철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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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19회 작성일 2022-02-11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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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혁


· 1933년 일본 석정(石井)광업소에서 개발 착수.

· 1937년 8월 일본인 광업권 설정 등록.

· 1938년 7월 일본 종연(種淵)공업주식회사 2,000만圓에 매수 채굴.

· 1939년 3월 일본 종윤실업(주) 이전 등록 후 해방 전까지 철광석 생산.

· 1945년 8월 해방 후 북한에서 채굴.

· 1953년 국유편입.

· 1955년 8월 수복 후 제1군사령부 공병부에서 개발.

· 1955년 12월 양양철광공사로 발족.

· 1963년 11월 대한철광(주) 이전등록

· 1967년 2월 국영에서 민영화(삼미개발주식회사)

· 1987년 2월 대한철광주식회사로 창립.

· 1995년 생산중단으로 폐광.



2) 채광


초창기 양양 광업소에서는 주로 서선리 탑동에서 철을 많이 생산하였는데 당시 탑동에서는 겉흙만 걷어내고 발파만 하면 철광석이 나오는 노천 채굴 광산이었다.

이때부터 일제는 본격적으로 채광을 시작하였는데, 이곳에 자철 함유량이 50∼80%인 양질의 철광석이 대량으로 매장되었음을 발견하고 전쟁무기 조달을 위하여 양양역을 개통한 후부터 철광석을 반출하기 시작하였으며 1941년부터는 삭도(속칭 솔개미차)를 가설하여 철광석을 광산에서 양양역까지 운송하였고, 1942년부터는 광산까지 레일을 깔아 화차로 양양역으로 운반한 다음 동해북부선철도를 이용하여 제련소가 있는 흥남으로 반출하였다.

일제가 광산에서 철을 한창 채굴할 무렵 광산지역에는 광업소 종사자들을 포함해서 무려 3만 여명이나 되는 인구가 살았으며, 탑동에도 약 5,000여명이 살았는데 이들은 탑동계곡 옆으로 지어진 여러 곳의 사택에서 광업소 종사자들은 가족들과 함께 집단생활을 하며 살았다.

이 사택들은 거마리 단지골에서 한 아름이 넘는 소나무들을 베어 집을 지었는데, 그 나무들이 얼마나 무거웠던지 우차에 한 토막씩만을 싣고 탑동으로 옮겨 각재 및 판자를 캐어서 사택을 지었다.



3) 철도 부설


일제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1941년부터 질 좋은 양양 자철광을 대량으로 수송하기 위하여 양양역에서 부터 서면 장승리 광업소까지 철도를 개설하기 시작했다.

철도가 개설되기 전에는 삭도(케이블카:속칭 솔개미차)를 이용하여 철을 양양역까지 운반하게 되었다.

그 당시 삭도 시설과 양양역에서 부터 광산까지 철길 노반공사를 조성하는데 서선리 탑동 계곡에서부터 흐르는 서선리 마을 앞의 안경다리 공사가 난공사였는데 이 공사에는 주로 전라도사람들로 구성된 보급대원들이 투입되었다.

지금은 안경다리가 철거되었지만 당시 보국대원들이 믹서기를 이용하여 콘크리트를 타설했는데, 이때 서선리 사람들은 개울에 있는 돌 자갈 주어 속칭 학꼬띠기를 해서 돈을 조금씩 벌기도 하였다.

또한 안경다리공사는 철근 대신 광산에서 사용하다가 다 닳고 못쓰게 된 와이어를 사용하였으며 4명이 1조가 되어 산을 깎아내고 흙을 파서 손수레로 운반하여 상자에 넣고 다졌으며 공사에 동원된 보국대원들은 서선리 마을에 있는 함바집에서 숙식을 하였다.



4) 기차 운행


1942년 9월경 양양광업소에 기차가 개통되었다. 광업소 구내에 장승역이 들어서면서 양양에서 광산까지 기차가 하루 2차례 왕복하였다.

광산에서 양양역으로 철광석을 실은 화차는 양양역에서 출발하는 동해북부선의 객차와 화물칸에 이어 달아서 바로 운행될 수 있었다.

광산역(장승리역)에서 운행되는 기차에는 객차도 2량이 달려있어 이 객차에는 주로 광업소 종사원과 그 가족과 그리고 광산 주변의 주민들도 이용하였다.

양양역에서 기차가 광산으로 올라와 방향을 바꾸어 다시 양양역으로 내려 갈 때에는 기차 앞부분인 기관차를 지금 광산 굴에서 조금 더 내려와서 후진으로 올라갔는데 이때 사람들이 직접 회전대 손잡이를 잡고 돌려서 기관차를 돌렸다.

당시 양양광산은 밤이 되면 복선으로 설치되었던 철로변 주위에는 항상 불을 환하게 밝혔으며, 역무원들이 수신호용으로 커다란 간드레(candle)를 흔들며 빨간불과 파란불을 번쩍거리며 사고방지를 위하여 주변경계를 삼엄하게 했다.

철도가 광산까지 개통되기 이전에는 양양역까지 철광석 운반은 삭도(속칭:솔개미차)를 이용하였다.

1941년경부터 삭도에 광석을 싣고 장승리 광산에서 거마리와 내곡리 모로골을 지나 청곡리를 경유 해서 송암리에 도착하여 양양역 설치한 조구통에 쏟아 놓은 후 화물차에 옮겨 싣고 동해북부선의 객차 뒤에 화물칸을 이어 달아서 15~20량 정도가 운행되었다.

삭도는 10~20m의 높이의 한 아름 되는 나무에 검은 기름을 칠하여 탑과의 거리는 지형에 따라 50m 또는 70~80m 간격으로 세웠으며, 로프에 매달려 가는 솔개미차와의 서로간의 거리는 약 50여m 간격으로 운행되었으며 운행속도는 느린 속도로 천천히 움직였으며 소음이 심했다.

동력은 영월 화력발전소에서 끌어온 전기를 사용하였으며, 바가지에 철을 실어 하루에 1~2회씩 24시간 운행하였으며 철광석을 실은 기차는 1일 1~2회 5~7량을 운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