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3호

5. 해방 이후 동해북부선 철도와 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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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850회 작성일 2022-02-11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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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해방으로 양양이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그나마 진행 중이던 양양~강릉간의 노반공사도 중단됨으로서 동해북부선은 이름 그대로 동해 북부인 북한에서만 운행하는 기차가 됐다. 하지만 양양철광산은 38°선 이북에 위치하여 동해북부선 철로를 이용하여 흥남제련소로 계속 운반되었다.

뿐만 아니라 북한는 6·25 기습남침을 위하여 야간에 이 선로를 이용하여 탱크 등 수많은 전쟁 물자를 비밀리에 실어 나르는데 활용하기도 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기간 시설물인 탓에 유엔군의 함포 등의 집중 폭격을 맞고 역사(驛舍)와 철로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후 휴전과 함께 1953년 수복지역인 고성~양양구간은 영업을 재개했으나 서류상의 부활이었고, 1967년 공식 폐역이 될 때까지 열차운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로서 이러한 애환을 간직한 양양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 양양역


1937년 12월 1일 개통한 동해북부선의 양양역은 현재 역사(驛舍:대합실), 플랫폼, 관리사무소(管理事務所), 철광석 집하장인 조구통, 어름창고 등은 아직도 기초 시멘트 구조물 등의 흔적이 남아있고, 양양역에 인접한 산(뱀째산) 위에는 기차 운행당시에 사용하였던 물탱크가 아직도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그 산 아래에는 기차에서 온수를 사용하려고 물을 대우는 가마시설과 물을 용이하게 공급하기 위한 급수탑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그 옆에는 우물도 있었다.

그리고 현재 양양역 주변은 대부분 농지와 농로 그리고 일반 사업시설이 들어서 있고, 당시 기차가 다니던 철로는 청곡2리에서 양양역이 위치해 있던 송암리를 지나 연창리를 경유하여 양양시내로 왕래하는 도로로 사용되고 있다.




<그림 5> 양양역 부대시설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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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驛舍:대합실)

2. 관리사무소

3. 플랫폼

4. 철광석 조구통

5. 물탱크

6. 빙고·변전소

7. 창고

8. 관사10동

9. 여관2동

10. 경찰주재소

11. 창고

12. 기관고(機關庫)

13. 온수시설

14. 급수시설

15. 우물

16. 석탄야적장

17. 목재야적장

18. 전차대(轉車臺)

19. 석탄재야적장

20. 목재야적장

21. 창고

22. 기차레일선(약6~7개노선)

23. 마사(馬舍)

24. 유흥음식점




당시 동해북부선은 영동지역 주민들이 원산을 경유 경원선을 통하여 서울을 왕래하기 위한 출발지역과 종착역이었던 양양역은 기차를 돌릴 수 있는 철로가 여러 개 있을 정도로 규모도 제법 큰 편에 속했으며, 역 광장 앞의 현 7번국도인 동해대로 건너편에는 여관과 창고 그리고 경찰주재소 건물이 있었다.

양양역이 개통되자 동해안의 영동지방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서울과 금강산을 가려는 사람들, 공부를 하는 학생들, 장사를 하러 다니는 등 많은 사람들이 양양역에 몰려 역사 일대 주변에는 많은 여관과 식당들이 즐비하여 역 광장과 주변에는 항상 활기가 넘치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양양역에서는 양양광산에서 채굴되는 철광석과 이 지역 산지에서 생산된 목재를 가득 실은 기관차가 원산방면으로 운행하였고, 증기기관차에서 석탄을 사용하는 석탄과 기관차에서 남은 석탄재 야적장이 있었으며, 또한 우차로 운반되어 온 목재 야적장이 있었는데, 이때 땔감으로 사용하려고 솔딱지(소나무 껍질)를 벗기려고 주변 동네사람들이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루기도 하였다.

당시 단층 건물로 지어져 있던 양양역에는 역장을 비롯 선로반, 기관부 직원 등 100여명에 가까운 인원이 근무를 했고, 청곡2리에는 역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이용하는 관사도 10동이 있었으며, 역 주변에는 여러 동의 창고와 기관차를 넣어 두거나 수리하는 기관고(機關庫)가 있었다.

1937년 12월1일 개통된 동해북부선의 양양역은 현재 역사(驛舍:대합실), 플랫폼, 관리사무소, 창고, 어름창고, 그리고 속칭 솔개미차(삭도)로 양양광업소에서 실어온 철광석을 쏟아 부은 집하장인 조구통 등은 아직도 기초 시멘트 구조물 등의 흔적이 남아있다.

양양역 부대시설로 유일하게 아직도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시설이 있는데 양양역에 인접한 해발 38.5m인 뱀째산 위에는 기차가 운행할 당시에 사용했던 약140여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물탱크 시설이 있다.

물탱크 입구 구조물은 가로1.4m 세로1.4m로 물탱크실로 내려가려고 ㄷ자로 만든 철근 손잡이가 있으며, 물탱크 내부 규격과 면적은 가로 6.2m 세로 5.8m로 약11평이고, 높이가 4m로 물탱크 실은 칸막이형식으로 두 개로 나누어져 있는 중심부분에 ㄴ자 형태로 홈을 내어 발로 밟고 내려가도록 만들었다.

그 밖에 흔적은 남아있지 않지만 뱀째산 밑에는 기차에서 온수를 사용하려고 물을 데우던 가마시설과 물을 용이하게 공급하기 위하여 급수탑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그 옆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물에서 펌프시설을 이용해 뱀째산 위에 있는 물탱크로 물을 뽑아 올렸다.

당시 열차는 증기기관차로서 운행 중 증발하는 물을 보충하여야 하였던바 양양역에 대형 물탱크와 물을 데우던 가마시설까지 시설하였다는 점, 그리고 안변~양양구간 192.6km를 8개 구간으로 나누어 1~2년에 1구간이상 개통하였었음에도 1937년 양양역 개통이후에는 해방까지 8년간 한구간도 개통하지 못한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조선총독부 조선철도 12년 계획에는 동해선을 부산까지 연결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내심 양양역이 철광석 수탈을 위한 종착역으로 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증기기관차에서 사용하는 석탄 야적장과 석탄재 하치장이 있었으며, 우차(牛車)로 운반되어 온 목재 야적장이 여러 군데 있었는데, 이때 땔감으로 사용하려고 솔 딱지를 벗기려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 북새통을 이뤘으니 당시 서민 가정의 어려웠던 연료 사정을 짐작케 한다.

역내에 주요시설인 기관차를 수리 점검하는 기관고(機關庫)가 있었으며, 양양역이 종착역이므로 역내에 약 6~7가닥의 기차 레일이 있었으며 기관차의 앞뒤 방향을 돌리는 전차대(轉車臺)가 있었다.

단층 건물로 지어져 있던 양양역의 대합실에는 기차표를 사는 창구가 3군데나 있을 정도로 그 규모가 컸으며 역사(驛舍)에는 역장을 비롯하여 선로반, 기관부 직원 등 100여 명의 인원이 근무했었는데 청곡2리에 역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사용하는 사택 10동과 역 주변에는 여러 동의 창고가 있었고, 현 7번국도 건너편에는 손님들을 위한 여관 건물 3동과 창고(해방 후 비료창고)가 있었고 그 옆에는 경찰주재소가 있었다.



2) 낙산사역


낙산사역은 강현면 정암리 952번지 일대로 이곳에서는 서쪽으로는 설악산 대청봉과 장산벌판(짐미뜰)이 남쪽으로는 낙산사가 북쪽으로는 대포항이 바라다 보이는 해안가 절경지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에 플랫폼과 목재 및 명태 적하장이 있었고 중앙에 역사와 대합실이 남쪽에 관사가 한 줄로 배열되어 있었다.

6·25전쟁 때 많은 마초가 쌓여있었는데 유엔군의 폭격으로 파괴 소실된 후에도 오랫동안 승강장 플랫폼과 대합실 등 건물 흔적이 남아있고 인근 농민들이 주위를 농지로 개간하여 경작하였으나 90년대 민간이 임대받아 벽돌공장을 운영하였으며 2009년 6월 낙산연수원이 개원하면서 현재는 흔적마저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


<그림 6> 낙산사역 부대시설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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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타 동해북부선 철도의 흔적들


양양군 관내에 남아있는 동해북부선의 터널은 5개소로 붕괴되거나 붕괴우려가 있는 3개소는 폐쇄되었고, 1개소는 철거되었으며, 1개소는 마을간 연결도로로 사용되고 있다.

하천내 교각시설은 55개가 있었는데 하천 유수 장애시설로 2006년 철도공사에서 모두 철거하였으며, 교대와 암거시설은 25개소로 5개소는 철거되어 현재 20개소가 남아있다. (위치별 내역 별첨《기타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