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성내리 이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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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79회 작성일 2018-03-12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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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찬호 (남, 90세 양양읍 성내리)
■ 면담일 : 2015.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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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를 남한으로 안내하다 또 다른 친구인 세포위원에게 발각되다.


서면 송어리에 살면서 오색에서 양양까지 임산사업소 목재를 우차로 운반하는 일을 하다가 집에 돌아오니 친구가 집에 와있다.
“나를 좀 살려줘”
이유를 물으니 나를 38°선을 넘겨달라는 것이다. 그때는 서로 감시가 심하니 말도 크게 하지 못하는 시대였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에게 친구 일을 말하니 아버지께서는 나를 보고 길안내를 해 주어라, 라고 말씀 하셨다. 그런데 이 일을 동갑내기 친구가 어떻게 알고 내무서에 일러바쳐 잡혀가게 되었다.
나는 친구였던 그가 세포위원인줄 몰랐다. 나는 서면 송어리에 살았으므로 서면 내무서에서 양양 내무서로 넘겨져 감방에 들어가니 노돈 형님도 있어 거기서부터 형님과 인연이 되었다. 그런데 내무서 에서는 꼭 밤 1시가 되면 나오라고 해서 나가면 바른대로 말하라고 패기 시작한다.



◆ 형무소에 들어가 패통을 처서 농사일을 자원했다.


나는 죽는 건 이판사판이다. 내가 살아서 나오면 밀고한 친구인 너는 죽을 줄 알아라, 하고 독기를 품으며 참았다. 3년 형의 재판을 언도 받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형무소는 지방 내무서와 달리 밤으로 잠을 잘 수 있고 매를 맞지도 않기 때문이다. 원산형무소로 넘겨지고 나니 부모님께서는 내가 형무소로 간 사이에 이미 안변으로 이사를 와 계셨다. 형무소에는 반동파, 절도파, 잡범 등으로 구별되었는데, 나는 반동파에 속했다.
감방에는 매일 교도소 수칙을 외워야 한다. 1번부터 7번까지 있는데 번호를 대면 줄줄 외워야 하며 못 외우면 엄한 벌이 돌아온다. 또 패통(대나무로 만든 통으로 툭 치면 할 말이 있다는 표시임)이 있는데 할 말이 있는 자는 패통을 치고 말 할 수가 있었다.



◆ 낮에는 비행기가 무서워 밤에만 우차를 몰고 짐을 운반했다.


나는 농사 경험이 있으니 논밭에 일하러 갈수 있다고 말했다. 그때 밥 한 끼가 한 숫깔 정도 되는 적은 분량으로 연명하는 판에 농장에 나가는 사람은 한 그릇씩 배식되니 일할사람을 모이라하여 나가니 50명이 나왔다.
밭을 파는 시험을 보는데 모두 못 먹다 보니 힘이 없어 일을 못한다. 조별로 일 잘하는 사람 1과 2등을 뽑아 모아서 15명이 농장에 배치되었다.
밭은 7,500평정도 되었지만 일이 능률이 잘 오르지 않자 모두 모여 대책을 마련하는 말을 주고받을 때 내가 교도 선생님 소만 구하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하니 교도관이 인제군 사람인데 소장에게 보고하여 나를 나오라고 한다.
“자네 소를 구해 주면 할 수 있겠나”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하고 소를 구하러 갔다. 어느 산골짜기에 들어가니 소가 가득해서 그 중에서 튼튼한 황소를 골랐다. 나는 농사일 하고 우차를 몰던 사람이라 소를 다루며 일하는 것은 자신이 있던 차에 우차도 구해주어 짐을 나르는 일을 하고나니 교도소 안에서는 최고 대우를 해주었고, 운반하는 일은 비행기가 무서워 주로 밤에만 했다.



◆ 원산 깡패와 탈출하다.


형무소에는 원산 깡패라는 자가 있어 그와 친하게 되었는데 그가 전쟁이 났으니 정신을 차려야 살수 있다고 했다. 이름이 고용세라고하는 그 깡패가 나를 보고 죄수방의 문을 따고 나와 함께 탈출을 하자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인민군들이 무슨 죄로 형무소에 들어온 사람들인지는 몰라도 10명씩 나이롱 끈으로 묶어 끌고 나가 차례로 총살을 시켰다고한다. 나는 그 깡패와 죄수방의 문을 용케 따고 형무소를 탈출하여 맨발에 죄수복 차림으로 어딘지도 모르는 방향으로 디랬다 뛰었다.
그렇게 얼마인지 도망을 가는 도중“손들어”하고 철모를 쓴 군인이 총을 들이 대자 우리가 겁에 질려 손들고 나가니 총으로 막 팼다. 사정을 말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두들겨 맞고 있는데 국군소대장이 왔다. 그는 죄수복에 맨발 차림을 한 우리를 보더니 그 졸병에게 왜 때렸느냐고 나무란다.
그리고는 우리보고“고생이 많았소.”하고는 헌병대에 인계하니 헌병대에서도 그동안“고생 많으셨습니다.”하고 공손하게 대해주었다. 그 후 국군 무장대 700여 명과 같이 인민군을 상대로 전투를 도왔으며, 나는 분대장으로 인민군 포로를 지키는 업무를 주었다.